그냥, 동기나 학교 친구들과 선배들을 보고 있으면, 또는 그들의 작업들을 보고 있으면 학교 생활이라는게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닌데, 참 나는 어렵게 생활을 했다는 느낌이 든다.
그냥 즐기듯이, 쫓기듯이 생활했으면 다른 사람들처럼 적당히 괜찮은 포트폴리오도 갖추고, 인맥도 갖추고 재미있게 생활했을 것 같다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내 학교생활을 간단하게 돌아보자면, 나는 정말 많은 방황을 했다. 군대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뭘 할지, 뭘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고 혼란스러웠다. 디자인과에 오기 전 고등학교 때만 해도 나는 구성주의 예술가들과 얀 치홀트와 같은 모던 디자이너들의 위대한 작업들에 크게 경도되어 있었고 나는 죽었다가 깨나도 그래픽 디자인과 편집 디자인을 할 것이라고 믿었다 (정작 나의 게으른 독서 습관때문에, 얀 치홀트가 나중에 새 타이포그래피를 부정했다는 것은 대학에 가서야 알았지만.)
나는 대학에 가서 그래픽 디자인과 편집 디자인 분야에 상당히 큰 한계를 느꼈다. 조형성과 양식 따라하기에 의존하는 디자인에 싫증을 느꼈고 더이상의 문제해결 방법은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직접 그 한계에 도달해본 적은 없지만, 지금 이 길로 계속 걸어간다면 내가 알고 있는 그 한계에 부딫쳐 나중에 디자인을 하는 것이 싫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두려웠고 디자인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나는 2학년 즈음부터 사진에 꽤 관심이 많았고, 사진예술 분야가 각광받는 (거품이 부풀어오르는) 중이었으므로 사진 쪽을 주로 공부하기 시작했었다.
나는 사진 작업과 기술들을 정말 열심히 배웠고 누가 보든 말건간에 열의에 불타서 수많은 작업을 했다. 지금 보면 작위적인 것들이 많고 썩 정리가 잘 되어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때의 열의가 느껴져서 좋다. 정말 바보같이 몰두해서 작업을 했었다. 10키로에 가까운 조명이며 장비를 매일매일 빌리고 반납하며 지고 다녔었고, 사진의 원리와 수많은 사진기들의 디자인과 구조들, 작동방식에 대해 공부했었다. 그게 누가 지금 하라고 시켜서 하면 가능할지 크게 의심스러운 일들이지만, 어쨌든 무언가를 좋아하고 집중한다는 것의 기쁨을 그 때 배웠다. 아마 내가 평생 경험못할 연애의 대체물이었을지도...(...)
하지만 '덧치 디자인 스타일' (이 '스타일' 운운은 내가 디자인계를 한편으로 혐오하는 이유지만) 등의 내가 잘 모르던 새로운 사고의 방식들, 직접 디자인을 하는 것부터 기획까지 많은 것들을 알게 되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고, 다시 디자인 하기의 즐거움을 깨달은 것 같다. 한국 디자인계의 경색성이 여러 주변상황의 변화로 흥미로워지고 있는 것도 좋은 일이다.
예를 들자면 웹디자인에서는 AJAX, 웹표준과 플래시 축출 등의 변화가 이루어지려는 중이고 (아직 한국의 실질적인 웹환경은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최근 있었던 HTML5 설명회의 꽉 들어찬 객석은 한국 웹의 긍정적인 미래를 암시한다. 비록 전체적으로 2-3년 뒤쳐졌지만 말이다.) 아이폰 등 스마트폰의 출시, 외국 SNS의 침투 등은 앞으로 웹 환경을 더욱 발달시키는 데에 기여하는 중이다. 그래픽 디자인계는 슬기와 민, 워크룸 등 뛰어난 스튜디오/그룹들 등장으로 활기를 띄는 듯하다. 이런 좋은 분위기에 함께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 아닐까.
한동안의 긴 방황으로 인해 당장 내놓을 포트폴리오가 딱히 없다는 점이 문제..주섬주섬 모아보면 만들어지겠지만, 만족스럽지가 못하겠지. 어쨌든 '못다한 공부' 하느라 머리가 동강이 날 것 같지만, 이제 서비스가 끝나면 조촐하게 가내 수공워크샵이나 해가며 실질적인 작업들을 진척시켜 나가야겠다.